2024 호크마김 석사청구전 From the Shack, New Sprouts Come.
기억 속에서 흔들리는 나무와 지금 내 뒤의 고스란한 나무는 어떻게 포개지는가[1]
호크마김의 회화에는 오래전 찍어두어서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 가족사진을 다시 들여다볼 때의 시간이 담겨있다. 기억이 자리하기도 전에 찍혔던 나의 어린 모습, 지금은 만날 수 없게 된 이의 낯설고 앳된 표정 그리고 여전한 미소를 품고 있는, 지금의 나와 빼닮은 이까지. 사진 속의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서 없어져도 남아 있을 프레임 속 순간을 살피듯 작가의 회화 앞에 선다. 종이 위로 뿌리를 내린 나무들을 눈으로 살필 때면 저마다의 나무 형상을 따라 움직이는 가장 외부의 선까지 나무의 잎사귀와 가지의 흔들거림이 가득 채워져 있다. 작가는 홀로 서 있는 나무 그리고 여러 나무 간의 거리가 가깝게 중첩된 경계와 모양새를 살피는 나무 형상 연구를 꾸준히 진행해 왔다. 나무 가족 이전의 연작에서는 나무 그 자체의 정체성과 인간의 연결 지점을 살피거나, 나무의 움직임이 주는 천진한 위로를 보여주는 방향이었다면 지금의 나무 가족 연작은 작가의 나무 형상 연구의 심화한 단계로서 다양한 거리감으로 얽혀 있는 나무들을 다룬다. 포옹하듯 완전히 겹친 나무에서부터 그늘 한 자락을 내어줄 정도로만 곁에 서로를 자리하게끔 허락한 나무들까지, 수 없는 나무 형상들은 작가의 가족에 대한 기억에서 시작하여 가장 작은 군집으로서 가족의 의미를 나무로부터 꺼내어 펼친다.
작가는 삶이라는 것에 속해 있는 자신의 기억과 이야기를 회화로써 들려주는 것에 대하여, 그러한 시작 지점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 속하여, 자기 자신이 있기에 시작되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더 나아가 우리가 삶 속에서 붕 떠 있는 기분을 들게 하는 쓰라린 감정 혹은 나눌 곳을 잃은 기쁨을 해소하기 위해 한 번쯤 되돌아가 봐야 할 곳은 나 자신이 시작되었던, 저 나무들 사이의 내 뿌리가 있는 그곳이 아닐까 하는 질문을 던진다. 호크마김의 회화는 묵묵한 표정의 사진사가 찍어주었던 가족사진을 다시금 함께 들여다보며 각자 ‘기억 속 가족’이라는 털 뭉치를 꺼내게끔 한다. 여기저기 뒤엉키며 부피감이 더해져 폭신한 이 털 뭉치는 보드라운 털 결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단단하게 매듭지어져서 털실이라고 하기에는 딱딱한 곳도 있을 것이고 그 매듭을 풀기 위해 손끝을 분주히 움직이다 이내 실패하고 곱슬곱슬한 잔털만 남은 곳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을 털 뭉치를 꺼내어 종이 위에 지문을 묻히듯이 나무의 색과 질감을 드러내기 위해 부단한 붓질을 반복했다. 따라서 호크마김의 회화에는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나무도 존재하지만, 그보다도 가족과의 시간과 경험이 포착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정지된 과거라기보다는 언제든 새롭게 되돌아볼 수 있는 상황으로서 자리한다.
이번 전시에서 호크마김은 기억에서 시작하는 자로서, 자신의 회화를 통해 현관 앞에 서 있는 마음을 집 안으로 들여온다. 그리고 그 마음의 복원을 위해 숲을 새로이 어루만지듯이 화면을 채워 나간다. 현관 앞에 서 있는 마음이란 둘 곳을 아직 정하지 못하여 자신의 그림자를 양손 가득 움켜쥔 채 방향을 잃은 것과 같은 상태이다. 아직 내려놓지 못한 무거운 그림자를 손에 담아 움직인 듯 구겨낸 종이 위로 스며든 안료는 복잡한 마음이 돌아다녔던 과거의 행방을 내어놓는다. 작가는 장지 위의 주름과 크랙을 땅이자, 상처로서 명명하였는데 회화의 그 어떤 푸른색보다도 먼저 도착한 이 흔적은 손으로 만든 회화의 길이자 근원에 대한 작가의 궁금증이 길게 뻗어져 뿌리 저편까지 향할 준비를 마친 기반이다. 그리고 나무의 표피를 따라 나무의 기저까지 내려가기 시작한다.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가지 끝에서 3배 정도 먼 거리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생태적 조건을 생각하면 <바로 그 오두막에서, 새순이 돋다>의 기다란 대지는 모든 나무의 뿌리가 다치지 않도록 한 작가의 배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상처의 크랙의 사이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에게 이 상처는 그 자체로 숨 쉴 틈을 제공하는 통로가 되기도 하는데, 이는 작가의 이야기가 고르게 안정된 풍경 앞에서 시작되지 않으며, 그 뒤의 흙 속에 뿌리를 내려져 시작됨을 보여주어 작품과 등을 대고 선 자로서 작가를 작업과 포개어진 상태를 떠올리게끔 한다.
작가는 뿌리 아래 등을 댄 채로 전시장 입구 유리 벽 속에 걸어둔 작은 1. <바로 그 오두막에서, 새순이 돋다>를 통해 먼저 보여준 뒤, 현관을 넘어 집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오게끔 하기 위해 120호 장지 세 장을 이어 붙여 6미터에 달하는 <바로 그 오두막에서, 새순이 돋다>를 벽면 두 개에 걸쳐 선보인다. 자연스레 현관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선 관람객은 기다란 화면 위에 자리한 각각의 나무들을 살피게 된다. 홀로 오롯하게 서 있는 나무들, 기둥은 각자 시작되었지만 서로를 무척이나 닮게 자라 겹쳐진 나무들 그리고 이미 숲을 이루기 시작하여 한 방향으로 바람결과 그림자를 내리고 있는 이들까지 다양하다. 우리 시대의 산림 생태에 대한 접근 방식은 복구에서 점차 복원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산림이 훼손되기 이전 원래의 상태에 가깝게 돌려놓는 것으로서 소생태계의 회복과 보존을 위한 식재가 진행된다. 산불로 인해메마른 대지를 드러낸 위로 그 토양의 속성에 가장 익숙한 나무들이 심어지고, 이들이 조금 자란 뒤에는 나무들과 친숙하게 서로 잘 엮이며자라날 식물들이 심어진다. 그렇게 자연스레 복원된 자연 속에서는 천이[2]가 이루어지고, 야생화가 활착[3]되기도 하며 산림의 ‘온전성(穩全性)’을 건강하게 회복하게 된다. 본 바탕 그대로의 고스란한 성질을 의미하는 이러한 온전성은 호크마김의 <바로 그 오두막에서, 새순이 돋다>가 전개되는 방향이자, 작가가 구현하고자 하는 나무가족의 궁극적인 형태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화면을 따라 작가가 식재한 나무들은 상처 위에서 ‘기억’을 ‘복원’하듯 채워진다. 그리고 이들은 고스란한 나무로서 함께 존재하기 시작한다. 2. <바로 그 오두막에서, 새순이 돋다>와 시선을 마주 보듯 자리하고 있는 7. <어떤 환경에서도> 는 바람과 함께 내리는 빗물을 맞으며 서 있다. 세 그루의 나무가족에게 이 순간은 축축한 아픔일 수도 있겠지만, 건조한 땅에서부터 불어온 흙먼지를 씻어내고 서로에게 더 큰 그늘을 만들어주며 가지 사이사이로 엮여 안아주기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작은 화면 속 시간의 뒷모습을 반대편 벽면 뒤 6. <어떤 환경에서도>가 자신들의 오래전 기억으로서 지켜보고 있다. 서로의 삶에 활착되어 가는 나무 가족은 <우리>와 <두개의 이야기>를 통해 전시장 내에 보이지 않는 뿌리 끝을 내려간다. 그리고 이 두 작품에서 드러나 있지는 않았던 뿌리가 뿌리가 흙 속에 뒤엉킬 때쯤 나무들의 그림자가 내 안에 들어서기 시작한다. 호크마김의 나무가족은 그렇게 기억 속에 고스란히 자리잡으며 온전하게 복원된다. 그리고 우리는 현관을 나설 마음의 힘을 얻는다.
전시장은 집과 참 닮은 구석이 많다. 가장 세밀하고 작은 소리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곳이며, 현관(전시장 입구)에 서 있는 생각을 안으로 불러들이는 걸음을 만드는 곳이다. 그리고 머무르지만 언젠가는 들어왔던 저 문으로 떠나게 된다. 현관을 나서며 돌아올 것을 직감했던 수많은 날을 지나 이번 전시는 일종의 이별을 준비하며 만들어졌다. 앞으로 호크마김이 우리를 초대할 수많은 현관을 상상해 보며 필자는 이 글의 마지막에 작은 선물로서 관람객 그리고 작가와 함께 들어가고 싶은 문을 만들어 두었다. 이 문을 따라 들어간 집 안에서 작가는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그 집 안에는 저마다의 그늘, 겹쳐진 서로 다른 모양의 잎 사이의 틈새가 고스란하게 상하지 않은 채로 자리한 나무들이 우리의 기억 속 나무들과 각자의 방식으로 포개어져 있을 것이다. 그곳의 푸르고 다정할 기운을 스쳐간 기억마냥 미리 떠올려본다.
[1] 안희연 《물결의 시작》 의 일부 시구 중, “물속에서 흔들리는 나무와 물 밖에서 흔들리는 나무는 어떻게 포개지는가” 를 변형하여 작성하였다.
[2] 천이(遷移) : 생물학 분야에서 어떤 생물 군락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식물 군락으로 변해가는 과정.
[3] 활착(活着) : 옮겨 심거나 접목한 식물이 서로 붙거나 뿌리를 내려서 삶.
[4] 안희연 《물결의 시작》에서 호크마김 작가와 대화를 나누며 가장 작가를 떠올리게 했던 구절 “오늘 처음 알았어요 내일도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줄게요” 을 현관의 문 모양으로 만들어 글의 마지막에 더하였다.
작가는 삶이라는 것에 속해 있는 자신의 기억과 이야기를 회화로써 들려주는 것에 대하여, 그러한 시작 지점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 속하여, 자기 자신이 있기에 시작되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더 나아가 우리가 삶 속에서 붕 떠 있는 기분을 들게 하는 쓰라린 감정 혹은 나눌 곳을 잃은 기쁨을 해소하기 위해 한 번쯤 되돌아가 봐야 할 곳은 나 자신이 시작되었던, 저 나무들 사이의 내 뿌리가 있는 그곳이 아닐까 하는 질문을 던진다. 호크마김의 회화는 묵묵한 표정의 사진사가 찍어주었던 가족사진을 다시금 함께 들여다보며 각자 ‘기억 속 가족’이라는 털 뭉치를 꺼내게끔 한다. 여기저기 뒤엉키며 부피감이 더해져 폭신한 이 털 뭉치는 보드라운 털 결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단단하게 매듭지어져서 털실이라고 하기에는 딱딱한 곳도 있을 것이고 그 매듭을 풀기 위해 손끝을 분주히 움직이다 이내 실패하고 곱슬곱슬한 잔털만 남은 곳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을 털 뭉치를 꺼내어 종이 위에 지문을 묻히듯이 나무의 색과 질감을 드러내기 위해 부단한 붓질을 반복했다. 따라서 호크마김의 회화에는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나무도 존재하지만, 그보다도 가족과의 시간과 경험이 포착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정지된 과거라기보다는 언제든 새롭게 되돌아볼 수 있는 상황으로서 자리한다.
이번 전시에서 호크마김은 기억에서 시작하는 자로서, 자신의 회화를 통해 현관 앞에 서 있는 마음을 집 안으로 들여온다. 그리고 그 마음의 복원을 위해 숲을 새로이 어루만지듯이 화면을 채워 나간다. 현관 앞에 서 있는 마음이란 둘 곳을 아직 정하지 못하여 자신의 그림자를 양손 가득 움켜쥔 채 방향을 잃은 것과 같은 상태이다. 아직 내려놓지 못한 무거운 그림자를 손에 담아 움직인 듯 구겨낸 종이 위로 스며든 안료는 복잡한 마음이 돌아다녔던 과거의 행방을 내어놓는다. 작가는 장지 위의 주름과 크랙을 땅이자, 상처로서 명명하였는데 회화의 그 어떤 푸른색보다도 먼저 도착한 이 흔적은 손으로 만든 회화의 길이자 근원에 대한 작가의 궁금증이 길게 뻗어져 뿌리 저편까지 향할 준비를 마친 기반이다. 그리고 나무의 표피를 따라 나무의 기저까지 내려가기 시작한다.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가지 끝에서 3배 정도 먼 거리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생태적 조건을 생각하면 <바로 그 오두막에서, 새순이 돋다>의 기다란 대지는 모든 나무의 뿌리가 다치지 않도록 한 작가의 배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상처의 크랙의 사이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에게 이 상처는 그 자체로 숨 쉴 틈을 제공하는 통로가 되기도 하는데, 이는 작가의 이야기가 고르게 안정된 풍경 앞에서 시작되지 않으며, 그 뒤의 흙 속에 뿌리를 내려져 시작됨을 보여주어 작품과 등을 대고 선 자로서 작가를 작업과 포개어진 상태를 떠올리게끔 한다.
작가는 뿌리 아래 등을 댄 채로 전시장 입구 유리 벽 속에 걸어둔 작은 1. <바로 그 오두막에서, 새순이 돋다>를 통해 먼저 보여준 뒤, 현관을 넘어 집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오게끔 하기 위해 120호 장지 세 장을 이어 붙여 6미터에 달하는 <바로 그 오두막에서, 새순이 돋다>를 벽면 두 개에 걸쳐 선보인다. 자연스레 현관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선 관람객은 기다란 화면 위에 자리한 각각의 나무들을 살피게 된다. 홀로 오롯하게 서 있는 나무들, 기둥은 각자 시작되었지만 서로를 무척이나 닮게 자라 겹쳐진 나무들 그리고 이미 숲을 이루기 시작하여 한 방향으로 바람결과 그림자를 내리고 있는 이들까지 다양하다. 우리 시대의 산림 생태에 대한 접근 방식은 복구에서 점차 복원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산림이 훼손되기 이전 원래의 상태에 가깝게 돌려놓는 것으로서 소생태계의 회복과 보존을 위한 식재가 진행된다. 산불로 인해메마른 대지를 드러낸 위로 그 토양의 속성에 가장 익숙한 나무들이 심어지고, 이들이 조금 자란 뒤에는 나무들과 친숙하게 서로 잘 엮이며자라날 식물들이 심어진다. 그렇게 자연스레 복원된 자연 속에서는 천이[2]가 이루어지고, 야생화가 활착[3]되기도 하며 산림의 ‘온전성(穩全性)’을 건강하게 회복하게 된다. 본 바탕 그대로의 고스란한 성질을 의미하는 이러한 온전성은 호크마김의 <바로 그 오두막에서, 새순이 돋다>가 전개되는 방향이자, 작가가 구현하고자 하는 나무가족의 궁극적인 형태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화면을 따라 작가가 식재한 나무들은 상처 위에서 ‘기억’을 ‘복원’하듯 채워진다. 그리고 이들은 고스란한 나무로서 함께 존재하기 시작한다. 2. <바로 그 오두막에서, 새순이 돋다>와 시선을 마주 보듯 자리하고 있는 7. <어떤 환경에서도> 는 바람과 함께 내리는 빗물을 맞으며 서 있다. 세 그루의 나무가족에게 이 순간은 축축한 아픔일 수도 있겠지만, 건조한 땅에서부터 불어온 흙먼지를 씻어내고 서로에게 더 큰 그늘을 만들어주며 가지 사이사이로 엮여 안아주기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작은 화면 속 시간의 뒷모습을 반대편 벽면 뒤 6. <어떤 환경에서도>가 자신들의 오래전 기억으로서 지켜보고 있다. 서로의 삶에 활착되어 가는 나무 가족은 <우리>와 <두개의 이야기>를 통해 전시장 내에 보이지 않는 뿌리 끝을 내려간다. 그리고 이 두 작품에서 드러나 있지는 않았던 뿌리가 뿌리가 흙 속에 뒤엉킬 때쯤 나무들의 그림자가 내 안에 들어서기 시작한다. 호크마김의 나무가족은 그렇게 기억 속에 고스란히 자리잡으며 온전하게 복원된다. 그리고 우리는 현관을 나설 마음의 힘을 얻는다.
전시장은 집과 참 닮은 구석이 많다. 가장 세밀하고 작은 소리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곳이며, 현관(전시장 입구)에 서 있는 생각을 안으로 불러들이는 걸음을 만드는 곳이다. 그리고 머무르지만 언젠가는 들어왔던 저 문으로 떠나게 된다. 현관을 나서며 돌아올 것을 직감했던 수많은 날을 지나 이번 전시는 일종의 이별을 준비하며 만들어졌다. 앞으로 호크마김이 우리를 초대할 수많은 현관을 상상해 보며 필자는 이 글의 마지막에 작은 선물로서 관람객 그리고 작가와 함께 들어가고 싶은 문을 만들어 두었다. 이 문을 따라 들어간 집 안에서 작가는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그 집 안에는 저마다의 그늘, 겹쳐진 서로 다른 모양의 잎 사이의 틈새가 고스란하게 상하지 않은 채로 자리한 나무들이 우리의 기억 속 나무들과 각자의 방식으로 포개어져 있을 것이다. 그곳의 푸르고 다정할 기운을 스쳐간 기억마냥 미리 떠올려본다.
[1] 안희연 《물결의 시작》 의 일부 시구 중, “물속에서 흔들리는 나무와 물 밖에서 흔들리는 나무는 어떻게 포개지는가” 를 변형하여 작성하였다.
[2] 천이(遷移) : 생물학 분야에서 어떤 생물 군락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식물 군락으로 변해가는 과정.
[3] 활착(活着) : 옮겨 심거나 접목한 식물이 서로 붙거나 뿌리를 내려서 삶.
[4] 안희연 《물결의 시작》에서 호크마김 작가와 대화를 나누며 가장 작가를 떠올리게 했던 구절 “오늘 처음 알았어요 내일도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줄게요” 을 현관의 문 모양으로 만들어 글의 마지막에 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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