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Namu (2025)
호크마김
나에겐 나무 지도가 있다. 내가 사는 도시 서울 안에서 오고 가는 길, 잠시 모험을 해보겠다고 떠났던 제주에서 1년의 시간 동안 많이도 돌아다녔던 자연의 곳곳에, 여행을 떠나 우연히 마주한 나를 반겨준 나무들은 그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뽐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초연하게 있어준 나무들 덕에 나는 가는 길을 잠시 멈추고 그저 바라봤다. 2022년 가을에서 겨울바람이 느껴지는 찰나였다. 우중충하고 바람이 한가득 부는 날에 나는 시도 때도 없이 드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털어내기 위해 한강을 찾아야 했다. 자주 걷고 뛰러 가는 한강공원에 버드나무가 거센 움직임으로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버드나무의 아래로 축 늘어진 가지들은 내가 눈물을 흘리는 동안 나뭇잎으로 만든 커튼에 들어가 울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거대한 바람에 웅장한 춤사위로 괜찮다고 말했다. 20대 내내 나를 괴롭히던 나의 약함, 병마로부터 싸워야 했던 시간들 안에는 이렇듯 나무의 위로가 있었다. 한 자리를 지키며 오랜 시간 살아내는 나무는 어떤 생을 살아갈까 생각하게 된다. 나무에게서 느껴지는 생의 의지는 나로 하여금 다시 살아 내자는 결단으로 이어진다.
2020년 까르띠에 재단에서 출판한 <Trees>를 접하고 하나의 사진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뉴질랜드 남섬의 최남단에 위치한 Slope Point에서 장벽없이 거센 바람을 맞고 가로로 자라게 된 나무의 사진이었다. 이 나무는 몸이 꺾여 가로로 자랄지언정 살아있었다. 바람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힌다면 나는 그 바람의 방향에 몸을 맡겨 친구가 되겠다는 몸의 흔적처럼 보였다. 이 나무에게 바람은 적이 아니라 다른 나무들과 다르게 아름다운 형상을 지니게 만들어준 친구였다. 나에게도 나의 지난날의 아픔은 바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의 시간을 나무의 형상에서 동질감을 느껴서인지 이 나무에게서 나 자신을 발견한다. 작은 드로잉부터 대형 작업에 이르기까지 같은 나무를 그리면서 나 자신으로 의인화했다. 또한 그동안 수집해온 나무 이미지들을 보고 드로잉으로 옮기며 각 나무에게 느껴지는 특징들을 내 주변사람들과 엮어 하나의 캐릭터로 만들었다. 그림의 화면은 연극의 무대가 되어 나무 캐릭터들이 연극적 구성을 이루었다.
주로 수채 과슈, 아크릴, 분채, 석채, 피그먼트 컬러를 사용한다. 색에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한다. 조색을 하는 것 보다 각 물감 브랜드에서 명명한 컬러 그대로를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고 색을 섞어야 한다면 팔레트에서 섞기보다는 화면에서 레이어를 쌓아서 섞는 편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내가 쓰고 있는 색의 고유성을 작업하는 동안 더 크게 느끼기 때문인데, 색을 연구하기 위해 비슷한 색끼리 옆에 위치시키며 면밀히 다른 색상임을 분석한다. 같은 이름이더라도 물감 회사가 다르면 약간의 차이를 이루고 있다. 색을 사용하며 환호성을 지르기도하고 엄청난 쾌감을 느끼는데 나무를 그리는 과정 속에서 색에 의한 환희가 워낙 커서인지 나무가 먼저인지 색이 먼저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제주도의 삼다수 숲길을 거닐며 나무가 가진 다채로운 초록색을 보는데 내 컬러 팔레트는 나무로부터 왔음을 느꼈다. 나무가 곧 색이고 색이 곧 나무가 된 셈이다. 또한 색에 대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을 나무에게 보이는 특징에 매치하는 것을 즐긴다. 작업을 이어오며 변하지 않는 재료는 한지의 한 종류인 장지를 바탕재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장지는 유약해보이지만 강하고, 칼 같이 떨어지지 않는 자연스러운 맛이 있다. 이러한 장지의 특징은 내가 나무를 그리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작업을 하는 동안 자유롭게 내 몸을 감각하며 예찬의 회화 미학 중 하나인 료이자오- 잠시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의 무아지경 경지- 상태가 된다. 나의 작업은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하다. 살아있다는 것, 살아내고 있는 생명들을 보면 “너희도 잘 버티고 있구나. 그것만으로도 참 아름답다. 잘 버텨주어 고맙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내 자신에게도 말한다. “살아내주니 대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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